왕릉은 도심 속 대중교통 이용만으로도 구경이 가능할 만큼,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. 그리고 그 위엄에 사료잡히게 되는데요.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. “왕릉 하나 만드는데 몇 명이 일했을까?” 입니다.
본 글에서는 왕릉의 형태와 왕릉조성에 투입된 인력 수에 대해 알아보는 내용을 담고 있으니 궁금하셨던 분들은 아래 이어지는 내용을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.
■ 왕릉의 형태
조선시대 왕릉은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합장릉으로 조성되었습니다. 합장릉은 ‘동문이실’의 형태이며, 그 모양을 살펴보면 사각형의 지하광을 둘로 쪼개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.
그렇게 구분된 두 개의 석실 천장에는 하늘의 일월성신과 은하가 그려졌는데요. 네 벽면에는 동서남북에 따라 사신도가 그려졌습니다.
동쪽에는 ‘청룡’ 서쪽에는 ‘백호’ 북쪽에는 ‘현무’ 남쪽에는 ‘주작’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. 그리고 남쪽방향에는 여닫이 형태의 문이 위치를 하고 있습니다.
조선시대 왕릉에 변천사에 있어 세조의 유언이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. 세조 이전의 무덤내부는 석실로 조성이 되었는데요.
이런 관습 속에서 세조는 유명무실한 것이 석실이기에 마련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. 때문에 세조 이 후 부터의 왕릉은 석실이 아닌 ‘회격묘’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.
◐ 회격묘(灰隔墓)란?
회격묘란 모르타르! 일명 ‘모탈’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묘를 말합니다. 조선시대 당시 모르타르의 재료로는 ‘석회’ ‘숯’ ‘가는 모래’ ‘황토’ 등이 사용되었습니다.
■ 왕릉조성에 투입되는 인력 수
그렇다면 이런 회격묘 조성에 투입되는 인력 수는 어느정도 였을까요? 이에 대한 답은 약 3천명입니다. 이전 석실에 투입되었던 인력이 6천명이 것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결과라 할 수 있는데요.
태조 ‘건원릉’을 예로 살펴보면 충정도에서 3천 5백명, 황해도에서 2천명, 강원도에서 5백명. 모두 합쳐 6천명 입니다. 그렇다면 기간은 얼마나 걸렸을까요? 이에 총 4개월이 걸려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.
6천명 보다 더 많은 인력이 투입된 능도 있습니다. 바로 세종의 어머니 원경황후의 ‘헌릉’이 그러한데요. 경기도, 충청도에서 각각 3천명! 강원도,황해도에서 각각 2천명, 수군 4천명 그 외 도합 총 1만 4천명 입니다.
지금까지 왕릉조성에 투입된 인력 수를 주제로 관련된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. 이렇게 인력이 어마어마하게 투입되었기에 이장은 생각지도 못할 거 같은데요. 그럼에도 왕릉의 이장은 이루어졌습니다.
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‘영릉’ 입니다.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 인데요. 문종의 짧은 재위와 단종의 왕위찬탈! 여기에 풍수의 이유로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위치해 있다가 여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합니다.